아르칸(Arkhan)은 발소리를 죽이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양 옆으로 황폐한 건물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막다른 길이었다. 주변에 흩어진 쓰레기와 벽돌 파편 외에 눈길을 끄는 물체라고는 건물 한쪽에 있던 문밖에 없었다. 목재로 만든 문은 이미 그슬리고 썩은 지 오래라, 마치 문고리를 돌리면 한 쪽이 뜯어져 나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르칸은 문 앞에서 눈을 감고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도시에서 밀려 올라오는 악취, 매연과 썩은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근처에 있던 도축장과 임플란트 공장에서 역시 특유의 냄새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피 냄새와 실리콘 냄새를 동시의 맡은 그의 머릿속은 멀미로 어지러웠다. 그는 그러고는 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건물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버려져있었고, 집 없는 거지조차 접근하지 않는 장소였다. 위를 향한 표면에는 대부분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었으나, 바닥은 너무나 오랫동안 오물을 뒤집어쓴 나머지 이전에 누가 지나갔는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앞으로 여덟 보를 걷자 방이 하나 나타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여덟 발자국을 떼자 벽이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인기척을 내서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는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만약 주변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면 감시 장치가 내는 고주파음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 소리도 단순한 이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 벽의 일부가 소리 없이 뒤로 젖혀졌고, 옷장보다 조금 큰 정도의 공간이 나타났다. 아르칸은 잠시동안 이 모든게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젖힌 문 뒤에 “잡았다!”고 적힌 종이 한장만이 덩그러니 붙어있는 막다른 길일수도 있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당장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그의 마음 일부에서는 그렇게 도망치려 하다가는 끝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 건물 밖에 남겨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돈도, 직업도, 집도, 가족도 없지 않은가. 혹시 저들의 손아귀를 간신히 피해 달아난다고 해도 겨울을 넘기지 못할게 뻔했다. 일자리를 제안 받은 몸이니, 제안에 응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리라.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방은 완전히 어둠에 싸여버렸다.
몸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것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방이 멈추고 문이 다시 열렸다.
아르칸 앞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다듬고 깨끗하게 면도를 한 모습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했지만, 입 꼬리에 아주 살짝 미소가 담긴듯 했다. 남자가 악수를 청했고, 아르칸도 손을 내밀어 응대했다.
“일이 잘못되면 당신을 없애는 수 밖에 없소. 잘 아시리라 믿겠소.”
“아. 그 때를 대비해서 항상 도망칠 준비는 되어있지요.” 아르칸이 대답했다.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면서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이 남자에게 곧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르칸은 이 친구가 꽤 마음에 들었다.
“멜락(Melak)이라 부르시오.” 남자가 말했다.
“따라 오시오. 구경 시켜 드릴테니.”
그가 고개를 돌리고 걸어나가자 아르칸도 따라 나섰다.
멜락과 아르칸은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복도를 지났다. 비록 환기 장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닫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흔히 느껴지는 답답한 정적은 없었다. 곧 문에 도착한 아르칸의 코에 진한 꽃 향기, 흙 냄새, 그리고 다른 모든 냄새를 덮는 땀내가 느껴졌다.
문 너머에 우주선도 들어갈만한 거대한 온실이 펼쳐졌다. 벽과 천장에 눈부신 전등이 붙어있었고, 그 때문인지 온실 안은 마치 한낮처럼 느껴졌다. 벽에는 흰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그 위에 글씨가 씌여 있었는데, 멀리서는 '10'과 '50'이란 숫자 밖에 보이지 않았다.
멜락을 따라 중앙의 길을 따라가던 아르칸의 눈에 온갖 식물들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가볍게만 차려입었고, 짧은 바지와 함께 하얀 러닝 셔츠나 브래지어를 겨우 걸친 정도였다. 남자들은 머리를 밀고는 하얀 수건을 매었고,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를 수 있었지만 대신 일 하는 동안에는 뒤로 묶고 있어야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멜락이 물었다.
“대단한데요.” 그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건가요?”
“온실마다 다르지. 여기엔 대략 200에서 210명 정도 있고. 기르는 식물의 종류에 따라 사람 수는 얼마든지 달라진다네. 다 해서 겨우 서른명 정도가 일하는 곳도 있고, 여기보다 더 큰 온실도 있지.”
둘은 계속 가운데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아르칸은 곧 여기 있는 사람들이 수갑이나 목줄 같은 것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두명 체격이 좋은 자들이나 발에 족쇄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죄수인가요?” 아르칸이 물었다.
“아니.” 멜락이 대답했다. “원할 때면 언제든지 도망가서 총에 맞을 수 있거든.”
아르칸이 웃었다. “네, 네, 하하하. 그렇죠.” 그는 이렇게 그를 옥죄고 있는 긴장감에 맞서고 있었고, 멜락의 짖궂은 농담도 그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고맙기는 했다.
“그래도..” 아르칸이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겁니까? 저렇게 손에 흙 묻히는 일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특히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분명 짧은 시일 내에는 저들을 풀어줄 생각도 없으신 것 같은데..?”
“믿음이란건 존재하지 않지.” 멜락이 말했다. “오직 희망과 기대만 있을 뿐일세. 자네의 위치도 둘 중 어느 쪽이 자네에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그는 허리를 굽히고 있는 죄수 하나를 불러 세웠다. 그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옆에 있던 키 큰 식물에서 채취한 가는 잎이 수북했다. “어이, 거기 자네!” 멜락이 외쳤다. “여기 있는게 행복한가?”
죄수가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탈출하고 싶나?”
죄수가 이번에는 썩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카메라나 감지기가 없는 곳에서 한 눈 팔고 있는 경비를 만나면 어떻게 하고 싶은가?”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이겠습니다!”
멜락이 한 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말인가?”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처박고 때려 눕힐 것입니다!”
“좋아. 좋아. 역시 자네 답구만.”
죄수는 다시 바구니를 주워들고는 잎을 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붕붕거리며 귀찮게 하는 파리 떼를 쫓기 위해 팔을 휘휘 저었다. 파리 떼가 잠시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이내 제 위치로 되돌아갔다.
“저게 뻥이 아니라구요?” 길을 걸으면서 아르칸이 대답했다.
“진짜 경비를 죽이고 탈출하겠다고 한 건가요?”
“죄수를 시켜 마약을 만드는 곳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일을 시킬 생각이지? 매질로? 고문을 가해서?” 멜락이 되물었다. “경비병의 숫자가 죄수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데? 만약 문제가 생기면 여긴 즉시 차단되는 거고, 그러면 경비들은 다 죽게 되지 않겠나. 여기 식물들에게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감지되면 즉시 수면 가스가 온실 전체에 투입된다네. 물론 너무 오랫동안 뿌리지는 않지. 죄수들은 물론 경비들의 건강에도 안좋으니까. 우리는 그저 죄수들을 패지는 않는다네.”
“체벌이 없다구요?” 아르칸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반란이 일어나면 사형을 가하기는 하지. 그 외에 체벌은 없다네.”
“그럼 임플란트를 쓰지 그래요? 통각 자극 장치라던지, 아니면 칼다리에서 쓰는 정신 고문 칩 같은 것 있잖아요. 그렇게 하면 반란이란 걸 일으키지 못할텐데요?”
멜락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첨단 장비라는 건 비싸고 잘 고장나기나 하지. 제대로 된 전자기기라고 부를만한게 딱 하나 있지만, 죄수를 다루는 것 과는 아무 상관없는 장비일세.”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음… 직접 연관은 없는거지.”
“그게 뭔데요?”
“얼굴 스캔 장치.” 멜락이 말했다. “그 외에는 최대한 단순하고 튼튼한 도구를 쓰는게 이 곳의 원칙일세. 혹시 천장이 좀 높다고 생각 해봤나?”
“물론이죠.”
“절대 이유 없이 그런게 아니지. 애초에 이 곳을 설계할 때, 최대한 건물 밖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도록 설계했거든. 자신이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탈출을 꿈꾸기 마련이니까.”
멜락이 땀에 젖은 머리 위에 앉으려는 파리를 손으로 쫓아냈다.
“젠장. 어쨌든… 여기 죄수들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아까처럼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자유 시간도 주어지지. 도서관도 있고, 나름 운동 기구도 갖춰놓았고. 몇군데 손봐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구기장도 잘 돌아가고 있지.”
“다들 여기서 '오래오래' 살도록 하기 위한걸세. 알겠나, 아르칸?”
아르칸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한 마디 덧붙이려 했으나, 불현듯 뭔가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당연하지. 모를거라 생각했나?”
아르칸이 벙찐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뇨, 물론 알고 있을 거라 짐작 하기는… 했지만…”
“막상 부딫히지 겁이 났겠지. 안그래?” 멜락이 말했다. “혼자 뿅하고 나타나서, 자기 소개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그래도 이미 자네를 이렇게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죠.” 아르칸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걸세. 자네는 이미 뒷조사를 당했고 통과되었지. 내가 이렇게 자네와 말하고 있는 이유도 자네가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믿어주기 때문이야. 자네가 맘대로 질문하는걸 내가 친절하게 답해주는 것 도 바로 그 때문이고.”
멜락이 아르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린 자네를 잘 알아. 그러니 자네도 우릴 알아야 공평하겠지. 어찌 되었든 우리 조립 라인에서 자네가 평생 일하게 될테니까. 아주 오랫동안 이 곳을 집으로 여기고 지내야 하겠지.”
멜락이 다시 손을 휘휘 저었지만, 파리가 물러나지 않고 머리카락에 자꾸 달라붙으려 하고 있었다.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말하게.”
“이렇게 파리가 귀찮으면 그냥 살충제를 쓰는게 어때요?”
갑자기 멜락이 미친듯이 웃기 시작하자 아르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아르칸을 보고는 “미안하지만, 아직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네. 아직은, 말이야. 그저 여기 있는 모든 것처럼, 그 놈들에게도 뭔가 목적이 있다고만 말해주지.”
비록 확실한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르칸은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대답해주었다는게 놀랍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뭔가 숨기는 점이 있어서인지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숨기는 점이야말로 지금까지 보고 들은게 사실이라는 반증이기는 했지만.
둘은 온실의 끝에 다다랐다. 거기서 아르칸은 뭔가 하나를 확실히 해야 된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그래서… 고문 같은건 없다구요? 처벌도?”
“혹시 탈출할 생각인건가?” 멜락이 물었다.
“아니… 사실은….”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답했다.
“그래요. 전 여기서 영원히 갇히게 된거죠. 안그런가요?”
“정확히 그렇지는 않아.” 멜락이 말했다. “만약 여기서 제대로 일만 한다면 종종 유급 휴가도 보내줄 수 있지. 단지 이 곳에 대해 발설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죽기는 하겠지만. 잘 알고 있겠지.”
“그래요..” 아르칸이 말했다. “알아요.” 그리고는 서서히 발걸음을 멈추고는 근처의 흙더미 하나를 발로 찼다. “진짜 고문 같은건 없는거죠?”
멜락이 잠시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따라오게.”
그리고는 출구로 나가는 대신 나무들을 헤치며 그 사이로 걸어갔다. 아르칸이 그 뒤를 따랐다.
약 1분 후 두 사람은 작은 개간 지대에 들어섰다. 온실의 다른 지역에서는 죄수들끼리 일하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기서는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아르칸은 이들이 여러 식물에서 잎을 채취하여 버들고리 바구니에 넣는 장면을 보았다. 다른 죄수들 처럼 얇고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의 얼굴만은 볼 수 없었다.
이 곳의 모든 죄수들은 하나같이 하얀 석고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치 강제로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아버리고는, 석고를 붓고 내버려둔 것만 같았다. 눈, 코와 입이 있는 곳에는 대충 구멍을 뚫어놓기는 했지만, 가면을 벗을 방법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칸이 멜락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이긴 했지만, 귓속말을 하듯 멜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멜락이 부른 쪽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유령이 된거지.”
“이게 당신이 말한 처벌인가요?”아르칸이 물었다. “반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는 건가요?”
“…대체 무슨 짓을 한겁니까?”
멜락이 마지막 질문을 무시한 채 말했다. “아니. 전에 말했듯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냥 사형일세. 간단하지. 여기 있는 자들은 뭔가 다른 목적을 위해 선택된 것이고.”
“다른 목적?”
그러나 아르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멜락은 이미 온실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이번에 들어간 방은 규모가 작으면서 소독약 냄새를 풍겼다. 사방에 조립 라인과 컨베이어 벨트가 있었고, 곁에 온갖 기계 장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르칸은 곧 기계들이 하나같이 구식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원하는 대로 작동하기는 하겠지만,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임플란트 공장의 첨단 장비에 비해 초라해보였다.
멜락이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르칸의 기분을 알아챘다.
“실망한 모양이군.”
아르칸이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 항상 마약 사업을 한다는게 뭔가 폼나는 일일 것 같았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이 범죄 집단에 갖는 환상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는 결국 이 모든게 하루 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한 거란걸 알게 되었군. 다른 노가다 처럼 말이야.”
아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구성, 신뢰성, 유지비 절감, 그리고 단순함. 우리가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바이지. 최대한 고장나지도 않고, 고장난다 해도 여기서 즉시 고칠 수 있는 장비를 사용하는 곳. 그게 바로 자네가 평생 일할 직장의 모습일세.”
멜락이 불 꺼진 작업 라인 위로 몸을 기울였다.
“기준 미달인 부스터는 전부 걸러내야 한다네. 하도 지루한 일이라 두시간을 기준으로 교대하지만, 다들 맡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수송 라인, 기계 정비 같은 다른 일도 많이 있고.”
“모든 라인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무작위로 추출되서 검사를 받지. 새로운 주문이 들어올 때면 생산 라인을 그에 맞추어서 재정비해야 되고. 그래서 우리에겐 기계에 능숙하고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 필요하네. 자네처럼 말이야.”
“다른 죄수들을 쓸 수는 없습니까?” 아르칸이 물었다. “이미 일에 적합한 사람들을 많이 구하셨을 것 같은데..”
“가끔은 그렇게도 하지.” 멜락이 말했다. “이 곳의 죄수와 일꾼들 사이에는 엄격한 계급 체계가 있다네. 처음에는 온실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일 처리를 특출나게 잘 한다면 감독관 역할을 맡을 수 있지. 계속 잘 해나간다면 재고 관리 업무를 맡고, 그렇게 승진된 죄수들 중 똑똑한 일부는 생산 현장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는다네.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으니까 보통 외부인을 고용하는 것이고.”
“그럼 일을 잘 못한다면… 가면을 쓰는 건가요?”
“말하자면 그렇지.” 멜락이 대답했다.
“혹시 입구 근처에서 플래카드를 보지 않았나? 글씨가 쓰인 하얀 천 말이야.”
“당연하죠. 하지만 눈이 부셔서 숫자 몇개밖에는 못봤는데요.”
“죄수들의 명단이지. 일단 명단에 들어가면 안전하지.”
“가면을 안 쓰는 거죠.”
“맞아.”
“그럼 명단에 들어가려면…” 아르칸이 물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혹시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면 즉각 상부에 알려야 하지. 그러면 금방 50위 안에 들어갈 수 있다네.”
“죄수들을… 가면으로 위협해서 서로 감시하도록 만들었군요.”
“잘 이해하는군. 반란 계획을 미리 흘려주면 10위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물론, 그렇게 등수가 올라간 죄수를 누군가 함부로 건드린다면, 같은 반란 주동자로 간주되서 즉시 사형을 당한다네.”
멜락이 썩소를 지었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등수에서 밀려난다네. 그러니 다들 그 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멜락이 건너편에 있는 조립 라인을 가리켰다. “자네도 의견이 있으면 말하게. 외부인에게는 다른 보상이 있으니까.”
아르칸이 기계 장치들 사이를 지나갔다. 전부 자기 키의 두배는 될 듯 보였고, 하나같이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했다. 한 기계의 옆에 강철 통이 몇개 있었다. 아르칸이 통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부스터로 가득 차있었다.
“가져가고 싶지 않은가?”
“그다지요.”
“그다지?”
아르칸이 부스터 한 줌을 움켜쥐고는 손을 벌려 다시 통에 쏟아버렸다. “전부 군용 부스터 아닙니까. 포드 파일럿이나 이런 걸 할 수 있는데.. 그놈들 마저 안 쓰려고 하잖습니까.” 그러고는 다시 한 줌을 쥐었다가 통 위로 놓아버렸다. “길거리에선 아무도 할 생각을 못해요.”
멜락이 통 쪽으로 다가가서 몸을 숙였다. “혹시 길거리에선 그저 돈이 없어 사지 못하는게 아니겠나?”
“뭐라구요?”
“여기 있는건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온 약을 개량한 것일세. 사람들이 이걸 못 하는건 그저 공급이 없기 때문이지. 포드 파일럿들 끼리는 계속 사용했다네.”
아르칸이 한숨을 쉬고 눈을 비빈 후 계속 말했다. “이봐요. 포드 파일럿은 군용 부스터를 빨아서 배 조종을 더 잘 한다고 하지만.. 그 뿐이에요. 어떤 멍청이가 이걸 한다고 해도 약기운은 절대 안 생겨요. 미쳐버린다구요. 일반인이 할 물건이 아니라니까요.”
멜락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서 대답했다.
“일반인이라 해서.. 전부 그런건 아니지.”
“무슨 뜻이죠?”
“자네가 말한 일반인의 80%는 부작용 때문에 쓰질 못한다네. 하지만 10% 정도는 그저 다른 약을 할 때처럼 쾌감을 느끼지.”
아르칸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 듣는 소린데요.”
“사실일세.”
“그럼… 나머지 10%는요?” 아르칸이 물었다.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따라오게.” 멜락이 말하고는 공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르칸도 따라갔다.
둘은 파이프와 조립 라인, 증기를 뿜는 압축 탱크 사이를 걸어갔다. 사방에 있는 계기판과 모니터에서 바늘과 숫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아르칸은 어두운 방 안의 철망 바닥에 섰고, 철망이 뭔가 끈적끈적한 물질과 하얀 가루로 덮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오래되어 떨어져나간 페인트 조각처럼 보였다.
멜락이 걸으면서 말을 떼었다. “우리가 최대한 단순한 해결책을 중시한다고 아까 말 했었지? 주변에 있는 자원만을 활용해서 모든걸 최대한 단순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그 생각을 한 죄수는 아주 오랫동안 10위권 내에 있었다네.”
“어떤 해결책이요?” 아르칸이 물었다.
“나머지 10%는 어떻게 되는거죠?”
“죽지.”
“아…”
“보통 피를 토해서 피칠갑을 만들고는 쓰러지지. 약에 따라 증상은 좀 다르지만.”
아르칸이 침을 삼키려 했으나, 목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부스터는 신경과 신체에서 함선을 다루는데 필요한 부위에 작용한다네. 만약 함선을 다뤄본 적이 없으면, 인체 스스로가 약기운을 없애려고 별 짓을 다하게 되지.”
멜락은 아르칸을 금속제 벽에 싸인 거대한 방으로 인도했다. 방 안에서 조그맣게 흠흠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아르칸의 귀에는 마치 벌레 소리처럼 들렸다.
둘은 방의 문 앞에 섰다. 두꺼운 강철로 만든 문으로, 미사일도 거뜬하게 막아낼 듯 보였다.
“자네라면 이해할걸세.” 멜락이 말했다.
“아까 부스터에 중독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그런 사람들은 절대 여기서 일하면 안되네. 절대 안되지. 훗날 부스터의 부작용 때문에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일세.”
아르칸이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말했다. “어떻게 제가 중독되지 않는 척 한다는 것을 알아낼거죠? 바닥에 구른다던지, 벽에 머리를 박는다던지,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면…”
“다 드러나게 되어있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챈 아르칸이 최대한 시간을 끌려고 질문을 던졌다. “정말요? 제대로 속일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런 일은 없지. 시간 다 되었군. 이게 자네가 여기 온 이유일세. 분명 통과할 거라 믿네.” 그가 한 쪽 벽에 붙은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물 컵에 물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컵과 함께 뭔가 하얀 물체를 건넸다. 알약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입사 시험일세.”
“제가… 제가 죽으면..”
“여기 안에서 죽는게 낫지. 적어도 치우기는 편할게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거 하난 알아두게. 만약 이걸 먹지 않는다면, 자네가 죽을 확률은 100%일세. 종류가 궁금하다면 드랍(Drop) 부스터라고 말해주지.”
아르칸이 반항적으로 쏘아본 후 알약을 집었다. 다른 알약 처럼 겉보기에는 전혀 위험해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그는 본능적으로 멜락이 한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멜락 같은 고위 인사가 이렇게 선택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준 것 만으로도 과분한 자비를 받은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부스터는 최악이었다. 그 스스로는 아직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모습은 종종 봐왔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 소화전과 본드도 없어 골골대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간질약을 과용하다가 정말로 간질에 걸려버려 발작에 시달리는 놈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전부 부스터를(보통 단 한알을) 삼키고 나서 얼마나 지독한 경험을 했던지, 다시는 못하겠다고 맹세를 하고는 했었다. 신너조차 사치품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러자 아르칸에게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는…
살아있는 것도 사치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내놔요.” 그가 알약을 낚아채고는 물과 함께 한 모금에 삼켜버렸다.
“잘했군.” 멜락이 말했다.
“미친… 이젠 뭐요?” 아르칸이 말했다.
멜락이 천장에 매댈려있는 뭔가를 떼어내어 아르칸에게 건넸다. 뭔가 재미있다는 듯이 썩소를 지었는데, 그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질문일세. 마지막 시험이지. 아까 말했듯이, 주변의 자원만을 이용하면서 최대한 단순하고, 절대 속일 수 없지. 통과한다면 여기서 일할 수 있고. 실패한다면? 죽는거지.”
아르칸이 손에 쥐어진 물체를 살펴보았다. 파리채였다. 손잡이의 한 쪽에 피도(Fedo)가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 속의 뭔가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그가 말했다. 겁쟁이처럼 몸을 벌벌 떨면서도 목소리는 광인처럼 거칠어졌다. “미쳤어… 미쳤다고… 미친 새끼야!”
멜락이 뒤 쪽으로 걸어가고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저 밖에 있는 자들은 누구라도,” 아르칸이 말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리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놈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당장 머리통을 베어서 썩을 때까지 축구공 삼아 걷어찰거다, 알 겠 냐 고 미 친 새 끼야!!!”
멜락이 웃었다. “그래. 마침내 자네의 겉 껍질을 깨고 나오고 있구만. 잘 했어.” 그리고 아르칸을 다른 방으로 밀어넣었다. 방 가운데에 그려진 빨간 원과 철망으로 된 벽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으으… 대체 뭘 하란거지?” 아르칸이 파리채를 치켜들면서 물었다.
“다른 껍질을 깨면 돼.”
멜락이 대답하고는 뒤에서 문을 닫았다.
한동안 어둠이 방을 감쌌다. 곧 빨간 불이 들어왔다. 문이 철컹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한 층 커졌다.
“뭘 해 야 되냐고! 크아아아악!!!” 아르칸이 소리쳤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쉬이익 하는 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아르칸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래를 쳐다보았다. 파리채를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리채를 양 손으로 꽉 잡아보았지만, 힘을 살짝 풀자마자 다시 미친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르칸은 명령을 무시하고 떨리는 손에 화가 났다. 채를 더 꽉 잡아도, 파리채를 쉭쉭 휘둘러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빨간 불이 비치는 곳에서는 빨간 원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한번 원 위에 발을 살짝 올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점점 짜증이 났고, 붕붕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원 밖으로 움직였다 다시 돌아왔다. 발을 쿵쿵 굴렀다. 계속 뛰어 올랐다. 이제는 양 손이 모두 떨리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멜락에게 가서 자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려고 문으로 향한 순간,
등 뒤에 있던 벽이 스릉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유리 벽이 있었고, 그 뒤에는…
수천 마리. 수만 마리의 파리 떼가 몰려있었다.
무리로 뭉쳐있어니 흩어지면서 좁은 공간에 몸을 박고 있었다. 날개가 유리에 부딫히면서 서서히 몰려오는 태풍같은 소리를 냈다.
아르칸은 침을 꿀꺽 삼키려 했지만, 이미 목은 바싹 마른지 오래였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파리의 검고 반짝이는 몸이 마치 검은 독약 방울처럼 보였다. 그는 곧 증오로 가득 차 이를 빠득빠득 갈아댔고, 파리채를 미친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시선이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파리를 하나하나 잡아냈다. 파리들을 일일이 죽이면서 하나씩 숫자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목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 벽이 열리고, 검은 폭풍이 그를 덮쳤다.
멜락이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무릎을 꿇은 채 꿈틀거리는 아르칸이 있었다.
벽과 바닥은 온통 검은 덩어리로 뒤덮여있었다. 은빛 날개 조각이 공중에서 구름 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르칸은 온통 파리 피와 내장에 뒤덮여 있었다. 숨은 뚝뚝 끊어졌고, 땀이 팔에서 바닥에 붙은 파리 시체로 방울져 떨어졌다.
“약빨이 잘 들었나보지?” 멜락이 문가에서 물었다.
아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은 공허하게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잠시 떨렸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곧 바닥에 엎드려 토하기 시작했다. 위장까지 뱉어버리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아르칸이 다시 고개를 들자 멜락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비눗물이 벽 아래쪽에서 흘러나오면서 파리 시체와 토사물을 씻어내려갔다. 오물이 곧 바닥 끝의 철망 사이로 전부 흘러내려갔다.
그제서야 멜락이 방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가 걷는 동안 구두가 끈적끈적하게 바닥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아르칸에게 다가가서는 조용히 파리채를 손에서 빼내주었다. 손잡이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멜락이 말을 꺼냈다.
“직원이 된 것을 환영하네.”